오랫만에 시골을 향했다
5월의 논에는 황토빛의 물결이 넘실대고 올해의 새로운 결실에
부풀어오른 양 모내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초록빛의 작은 야산과 간간히 보이던 야트막한 무덤들 멀리보이는
병풍을 두른것 같은 큰 산들이 고향의 정취를 물씬 안겨준다
그 예전 버스가 지나고나면 뿌우연 먼지를 일으켰던 거친 신작로는 진한
검정색의 아스팔트로 바뀌어 있고 초가집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모내기를 위해 논길을 향해 가는 나의 발걸음은 오랜만의 농촌체험을 즐기는
흥분으로 가볍기까지 했다
집앞 10m쯤 가면 이백여평되는 작은 논이 있고 논에 이르기전 그 앞에는
시원하게 흐르는 냇가가 있었다
그 냇가 바로 옆에는 50여가구가 이용할 수 있는 우물이 우뚝 서 있었다
어릴적에 그 우물은 특별히 빨래 때가 신기하게 빠진다고 동네 어른들이 늘
말해왔었고 그 말에 전혀 의심이 없었던 나는 빨릿감이 있으면 쇠손잡이가
길게 매달리 진한 자주색 고무통에 빨랫감을 듬뿍 채워 놓고는 그곳을 자주
향했다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날에 강한 빛의 반사를 받으며 그 우물속의 물은
더욱 푸른 빛을 띄었고 그 안에 살고 있다는 커다란 수어 두세마리 중 한마리
가 간혹 푸른 지느러미로 눈길을 유혹하기도 했다
동네 어른들은 일년에 한번씩 두레박으로 그 우물을 모두 퍼서 새로운 물로
물갈이를 해주었는데 긴터널같이 우물 밑바닥에 이르면 진푸른빛의 숭어
몇마리가 파닥거리며 힘찬 생명력을 과시했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우물을 지켜주는 영감있는 생물이라 생각을 했던지 그
숭어들을 다시 깨끗한 우물속에 넣어주고 한해의 행운을 빌었던 것 같다
한번은 마당에서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막내동생의 울음소리가 그 우물근처로
부터 들려왔다
예사롭지 않은 울음소리에 놀라 급한대로 마루에 올라 뒷꿈치를 들고 바라보니 막내
남동생이 우물에 빠져 얼굴과 윗옷만 겨우 물위로 나와있고 남동생 또래의 동네친구
두명이 양쪽에서 윗옷을 겨우 잡고 있는 아주 위급한 상황이었다
가습은 두방망이질하고 피가 거꾸로 솟는것 처럼 현기증까지 일 정도로 당황해서
난 옆집사람들을 부르면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우리 동생 살려주세요 우물에 빠졌어요!"
다행히 허겁지겁 달려온 동네 아저씨 덕분에 남동생은 그 우물에서 안전하게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 이후로 그 우물은 때론 위험의 경고를 안겨주었지만, 어느 누구의 목숨도 그리
쉽게 삼키지 않았다.
아마 그때 정말 숭어 몇마리가 우리 남동생을 도와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고마움까지 들었다
여기저기 나온 동네 아낙네들이나 처자들이 함께 모여 동네의 시시콜콜 입에
오르내리는 작은 입소문부터해서 많은 고충들을 털어낼 때 그 우물의 물은
바가지로 퍼지는 물의 양만큼 물의 수심은 물금을 그어가며 내려갔었다.
물론 퍼려는 우리들의 수그러진 허리도 그 물에 빨려 들어가듯이
깊어졌었다. 하지만 희안하게도 그 우물은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평소
유지하는 그 수심을 이내 채웠다. 절대 넘치지 않고 우물턱아래 내 손 한뼘
정도 아래로 항상 물은 같은 양을 유지해 왔었다
농부의 땀에 젖은 옷들이 깨끗하게 말끔히 씻겨지고 헹구어진 후 꼭꼭 짜서
빨래통에 넣어 들고 나올 때 동네 고만고만한 아이들의 우물가옆 냇가에서는
물장구치는 함성이 귓가에 시원하게 울려줬다
집근처의 논과 우물 그리고 냇가는 일하는 공간이며 동시에 살림하고 놀
수 있는 장소가 되어주었다
세월이 지나 고향을 떠난 후 다시 돌아온 이곳은 여기저기 제법 큰 공장
같은 돼지 축사들이 세워져 있었고, 마을을 들어설 때의 느꼈던 풀잎냄새는
사라지고 사육장 특유의 냄새가 이맛살을 찌푸리게 했다
추억이 많이 깃든 마을을 지켜준다는 숭어가 살고 있는 우물로 발을 재촉했다
제발 그대로 있어주길 기대하는 마음은 가축오물로 더렵혀진 냇가를 바라보며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그래도 우물만큼은 남아 있기를 바라며 달려간 그곳엔
기막히게 빨래가 잘된다는 새파란 물도, 반짝거리며 우리들의 신비감을 자아냈던
감청빛깔의 물살을 가르는 숭어 몸짓도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지푸라기가 제멋대로 섞여있는 흙더미가 우물속을 덮어버렸고 나의 파란
물빛 추억의 흔적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된 듯했다
기계가 모를 심고 남은 빈공간에서 그래도 인간의 손이 필요한 곳에 여기저기
모땜질을 했다 질척한 논에서 나온 진흙이 무릎까지 올라 묻어있고 우물 곂에
있는 논두렁에 앉아 그 진흙이 바짝 마를 때까지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옛날 모내기가 끝나면 바로 우무ㅠㄹ가로 달려가 시원한 물로 진흙을 씻어
냈던 기억이 다시 되살아났다 남동생들은 냇가에 너나 할것없이 첨벙첨벙 뛰어
내려 더위와 땀을 시원하게 씻어냈었던 냇가의 기억까지도 안타까움에 한몫
곁들였다
메마르고 깔깔한 논길을 걸어나와 우물에 다시 다가갔다
논을 향해 나올 때 산자루에 띄엄띄엄 보였던 무덤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우물은 이미 '숭어의 무덤'이 되어버리고
그리고 그 어린시절의 잊지 못할 추억의 무덤까지도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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